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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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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소후는 기원전 746년 아버지 진 문공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즉위 후 숙부인 곡옥 환숙을 곡옥에 봉했으나, 이는 권력 약화로 이어졌다. 소후의 어머니인 진강이 정국을 주도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기원전 739년, 대신 반보가 소후를 살해하고 환숙을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소후의 아들 평이 뒤를 이어 진 애후가 되었다. 이 사건은 진나라 내란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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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소후
기본 정보
이름晉昭侯 (진 소후)
작위진나라의 후
통치 기간기원전 745년–기원전 739년
이전 통치자문후
다음 통치자소후
희 (姬)
백 (伯)
사망기원전 739년
추증 시호소후 (昭侯)
가문
왕조
가계
아버지문후
자녀소후
왕조
진나라

2. 생애

아버지 문공이 기원전 746년에 사망하자 진후(晉侯)로 즉위하였다.[2][3] 즉위 직후, 숙부 성사를 곡옥에 봉했는데, 곡옥은 진나라 수도 익(翼)보다 컸고, 환숙에게 귀의하는 무리가 많아 이 조치는 위험한 것이었다.[2][3] 두예는 소후가 위험을 느껴 성사를 곡옥백에 봉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소후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강정(晉姜鼎) 명문에 따르면, 진나라 문후의 부인이자 소후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진강(晉姜)이 번탕(繁湯) 정벌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진강이 소후를 도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4]

기원전 739년, 진나라 대신 반보(潘父)가 소후를 죽이고, 곡옥 환숙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환숙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소후의 아들 을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반보를 주살했다.[2] 이 사건은 진나라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며, 진나라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 1. 즉위와 곡옥 환숙 분봉

아버지 문후가 기원전 746년에 사망하자 진후(晉侯)로 즉위하였다.[2][3] 즉위 직후, 숙부 성사를 곡옥에 봉했는데, 곡옥은 진나라 수도 익(翼)보다 컸고, 환숙에게 귀의하는 무리가 많아 이 조치는 위험한 것이었다.[2][3] 두예는 소후가 위험을 느껴 성사를 곡옥백에 봉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소후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강정 명문에서 문후의 부인이자 소후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진강이 번탕 정벌을 주도한 것이 나타나, 진강이 소후를 도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고도 한다.[4]

진소후 7년(기원전 739년), 진나라 대신 반보(潘父)가 소후를 죽이고, 곡옥환숙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환숙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소후의 아들 평을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반보를 주살했다.[2]

2. 2. 진강정 명문과 소후의 통치

진강정(晉姜鼎) 명문에 따르면, 진나라 문후의 부인이자 소후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진강(晉姜)이 번탕(繁湯) 정벌을 주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진강이 소후를 도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4]

아버지 사후 즉위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 진소후 원년(기원전 745년)에 아저씨 성사를 곡옥 땅에 봉했다. 두예는 이를 두고 소후가 위험을 느껴 성사를 곡옥백에 봉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곡옥은 진나라 임금의 도읍 익(翼)보다 크고, 환숙에게 귀의하는 무리가 많아 이 조치는 오히려 동란의 기반이 되었다.[2][3]

진소후 7년(기원전 739년), 진나라 대신 반보(潘父)가 소후를 죽이고, 곡옥 환숙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환숙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소후의 아들 을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반보를 주살했다.[2]

2. 3. 반보의 난과 소후의 죽음

아버지 사후 진후(晉侯)로 즉위했으나,기원전 745년에 아저씨 성사를 곡옥 땅에 봉했다.[2][3] 두예는 소후가 위험을 느껴 성사를 곡옥백에 봉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곡옥은 진나라 임금의 도읍 익(翼)보다 크고, 환숙에게 귀의하는 무리가 많아 이 조치는 오히려 동란의 기반이 되었다.[2][3] 진강정 명문에서 문후의 부인이자 소후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진강이 번탕 정벌을 주도한 것이 나타나, 진강이 소후를 도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고도 한다.[4]

기원전 739년, 진나라 대신 반보(潘父)가 소후를 죽이고, 곡옥환숙을 임금으로 모시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은 환숙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소후의 아들 평을 진나라 임금으로 세우고, 반보를 주살했다.[2] 이 사건은 진나라 지배층 내부의 권력 투쟁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며, 진나라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참조

[1] 서적 史記 晋世家
[2] 서적 사기 권39 진세가제9 http://zh.wikisource[...]
[3]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1 전통문화연구회 2009
[4] 논문 융생편종과 진강후 명문 및 그 역사적 의의 동양사학회 200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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